시즌1[1-6화] 반려자의 가족, 그 가깝고도 먼 이름 (1)

반려자인 R의 동생을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이었다. 그는 열다섯 살, 수줍음은 많고 말수는 적은 성격이라고 했다. R은 끔찍이 아끼는 동생을 오랜만에 만날 생각에 비행기표를 끊은 날부터 노래를 부르고 다녔고, 나는 수시로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R의 나머지 가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동생은 나에게 있어 R의 가족을 대표하는 외교관과 같았으니까. 그를 만족스럽게 접대해야 영국으로 돌아가 '음, 나쁘지 않은 사람 같음. 수교해도 될 것 같다'라는 말을 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만나기 전부터 문제의 동생은 나에게 거대한 물음표와도 같았다. 일단 그런 소심한 성격을 가졌으면서 혼자서 영국부터 한국까지 14시간 비행을 할 마음을 어떻게 먹었는지부터 혼란했다. 의외로 대범한 성격인가? 아니면 알고 보니 그가 R을 무서워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오는 거 아닐까? 비행기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는데, 맘에 드는 비행기 기종을 타게 되어서 마지못해 오는 건가?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보아도 난 이 영국인 청소년의 캐릭터를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난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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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만난 첫날, 난 그의 앳된 얼굴에 반하는 엄청난 키를 보고 기함했다. (열다섯 살이 186센티일 수가 있어?) 형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위치에서 우리를 굽어보는 모습에 난 그가 나의 정수리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체취를 비롯해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 크나큰 장애물이었다. 말이 없는 사람에게서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말하면 나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지점을 공략해야 하는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R을 쥐어짜서 겨우 알게 된 그의 관심사는 비행기, 자동차, 자전거 등 각종 기계식 이동수단과 콘솔 게임. 그가 한국에 머무르는 2주 동안 이를 통달하기에는 나와 너무도 거리가 먼 주제였고, 공통의 관심사 없이 세 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기에 시간은 턱없이 부족할게 뻔했다.


그래서 이튿날부터 난 바로 들이대기로 했다. R이 잠시 자리를 비워 그와 내가 둘이 남겨졌을 때, 난 동생의 눈을 마주치려 애쓰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잘 잤어?"

아무런 영혼을 담지 않고 답해도 괜찮은, 아주 안전한 안부 인사. 난 그의 실제 수면 경험과 별개로 "응"이라는 답을 기대했다. ("아니"라고 하면 "왜?"라는 주관식 질문이 나올 텐데, 그렇게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면 수줍은 사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아니"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정적. 

침묵.

난 분명 내 영어에 큰 문제가 있어서 그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날 밤, 나는 R의 의견을 구했다.

"그... 혹시 내 미국식 발음을 못 알아들은 걸까?"

"아니, 그럴 리가."

"내 목소리 톤이 너무 날카로웠나? 데시벨을 좀 줄였어야 하나?"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너무 무례한 질문이었나? 영국에선 아침에 일어나면 그런 인사 안 해?"

"그것도 그럴 리가."


그렇다면 남겨진 가능성은 단 하나 아닌가.

"네 동생이 나를 싫어하나 봐."

난 진지하게, 가슴이 주저앉는 심정으로 힘겹게 꺼낸 말인데 R은 웃음을 빵 터뜨렸다.

"아, 무슨 말이야! 동생이 너 싫어하는 거 아냐. 내가 말했잖아, 말이 원래 없는 편이라고."

하지만 말수가 적은 거랑 대답을 아예 안 하는 거랑은 다르지 않나. 어떻게든 무례하지 않은 표현을 고르려 우물거리던 와중, R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오늘 너 출근하고 둘이 밥 먹는데, 동생이 너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어. 무슨 일 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는지."


그렇게 캐릭터 해석에 또 실패했다. 하지만 전날밤과 다르게 금방 잠에 들 수 있는 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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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여전히 대화의 진전은 거의 없었다. 객관식 질문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소통이 가능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젓가락을 써보라고 권유하면 된다는 걸 파악한 정도. (그럴 때마다 그는 "싫어"라고 분명하게 답하고 남은 음식을 묵묵히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전처럼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에게 마음속으로 던지던 질문이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나는 그를 얼마나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