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2-2화] 언니는 왜 이토록 고달픈 자유를 내게 권했을까

“언니, 진짜 가기로 한 거야?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짐을 뒤적거리던 사촌언니의 뒤통수에 대고 나도 모르게 속내를 뱉어버렸다. 언니가 아무 예고 없이, 어떠한 연고도 없고 심지어 언어도 할 줄 모르는 일본으로 이민을 갈 거라는 소식을 차마 믿을 수 없었으니까. 대체 왜? 한국에서 다니던 멀쩡한 직장을 떠나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몸을 던지는 언니가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언니보다 여덟 살이 어리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으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던 고등학생의 눈에는 최소한 그랬다. 


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언니는 내 속을 아는 건지 혹은 우리가 생각만큼 친하지 않았던 거였는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대신 방 한켠에 수북이 쌓인 짐에서 먼지 쌓인 통기타를 찾아내더니 내 손에 덜컥 쥐어주었다. “너 기타 배우고 싶다며. 언니는 이거 일본에 못 가져가니까 이제 네 거 해.” “공부하느라 정신없는데 기타는 무슨…” 안 그래도 좁은 기숙사에 짐만 될 거라고 마저 말했어야 하는데, 언니의 눈을 마주친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마치 별을 박은 듯 강렬히 반짝이던 눈빛. 발을 내딛으려는 미래가 예측불가능해야만 비로소 흥이 나는 모험가의 눈빛이었다. 그런 그녀가 입시생에게 기타를 하사하는 것쯤이야, 낯선 나라로 삶을 옮기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도전도 아니었을 테다. 


아, 언니가 기타 말고 남긴 게 하나 더 있다. “넌 공부 좀 그만해도 돼. 내가 너처럼 영어를 했으면 당장 학교 때려치우고 외국으로 나갔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아등바등 부대끼면서 살지 않을 선택지가 너에게 있잖아. 자유롭게 살아. 알겠지?” 단단한 목소리로 건네는 이 황당한 당부에 난 코웃음을 감추려 애썼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공부를 그만해도 된다니,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공부를 해야만 자유로워지는 게 아닌가? 지긋지긋한 입시의 굴레와 부모님의 걱정으로부터 해방되고, 내가 원하는 직업을 마음껏 고를 자유. 


나에게 이런 미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주는 선물을 곱게 받는 것 정도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기타를 들고 기숙사에 돌아온 나는 졸업할 때 즈음 여섯 개 정도의 코드를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천만다행으로 대학교에도 철썩 붙어 어른들의 잔소리로부터 일시에 해방되었다. 딱 한 명의 어른만 빼고. 한 번씩 귀국을 할 때마다 나와 밥을 먹으며 “넌 그냥 캐나다로 이민 가라” “크루즈 선원으로 일해보는 건 어떠냐” 같이 듣도 보도 못한 제안을 하던 언니가 어느 날 일본 사람과 결혼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랍지도 않았다. 몇 년 간 모은 돈을 털어 신혼여행으로 세계여행을 일 년 동안 다녀온 것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지향하던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선택지만 쏙쏙 고르는 그녀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부럽지도 않았다. 마치 SF영화 속 히어로를 보는 느낌이랄까. 나의 기준에서 그녀의 삶은 물리 법칙과 차원을 뒤트는 수준으로 신기했으니까.


그로부터 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뒤… 나 역시 만만치 않게 살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 변호사 시험 응시를 포기하고, 직장인 신분을 포기하고, 어떻게 기적적으로 남의 글을 고쳐 먹고사는 법을 터득했다가 그마저 또 포기해서 한 달에 백만 원만 벌어도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크루즈 선원은 아니지만 매일 날뛰는 파도 위에서 기우뚱거리는 듯한 기분은 비슷하다. 아, 영국인 배우자를 만나 근무 환경이 다국적으로 변한 것도 비슷해졌다. 내가 결혼 소식을 전하며 잠깐 주고받던 카톡에 답장을 잊을 정도로 언니와 나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대화가 끊기기 전에 언니는 내가 영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듯했다. 아마 내가 요즘 어떻게 사는지 자세한 근황을 전했다면 두 배로 크게 박수를 쳐주지 않을까. 비록 몸은 헬조선에 머물러있지만 평생 몸 담았던 치열한 경쟁에서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장하다, 드디어 너의 능력을 살려 너만의 길을 열었구나- 하고 말이다.


‘자유롭게 살아’. 언니는 축복하는 마음으로 건넸을 예언이 때로는 한없이 막막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의 마음대로 기획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이란, 모든 걸 내 손으로 다 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거대한 공백과도 같다. 난 분명 사전에 입력된 미션을 수행하고 레벨을 착실히 올리는 게임에 익숙했는데, 내가 지금 놓인 맵에는 미션은커녕 길가의 풀 한 포기조차 내가 색깔을 커스텀해서 직접 심어야 하는 지경이다. 진급 시험 응시, 자격증 취득 같이 눈에 보이는 레벨업 공략법도 없다. 심지어 더듬거리며 게임을 만들다가 영 아니다 싶어 그만두면 그동안 쌓은 경력이 다 리셋되어 사라지는 기분이다. 언니도 그랬을까? 틀 밖의 삶은 틀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 말고는 각자 생김새가 천차만별이라 묻는 게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십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길 위에 홀로 서있는 나는 오늘도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질문을 외친다. ‘나, 진짜 이렇게 살기로 한 거야? 이렇게 대책 없이?’ 사실 내가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거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도 잘 살 사람이라고 믿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