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낮 1시, 새벽 6시, 오후 3시. 지난주 귀국 후 시차 적응에 애쓰고 있는데, 기상 시간이 이렇게 늘 변하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무려 오전 10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물론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재택 알바도 그렇고, 제가 하고 있는 대부분 일들이 크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지라 스스로를 힘들게 재촉하진 않으려 해요. (물론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생활리듬 회복이 필요하겠지만요. 낮밤이 쉴새없이 바뀌어서 그런지 입병이 났더라고요.)
이번 시즌 주제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지 않겠다’였는데요. 알바 덕분에 전보다 안정성이 늘었을 뿐, 돈벌이 수단이 꼭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전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된 건 아니예요. 이전 에피소드에서도 여러 차례 다뤘지만 가벼운 주머니 때문에 스스로가 작아지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생계를 걱정하는 일이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이 더 만족스럽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아마도 이렇게 사는 시간이 쌓이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저에게 더 편안하게 느껴지고, 오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천천히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과연 그 태도의 변화가 무엇인지 몇 가지 적어보려 했어요. 적다보니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나머지 소재는 다음 편에서 다룰 예정인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

1. 소유, 소비, 물질과 맺은 관계를 돌아보다
직장인 시절에는 ‘돈 벌면서 고생한 나를 돈으로 치유하자’라는 생각이 당연했다. 나의 노력으로 번 돈으로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서 스스로가 어른 같이 느껴져 뿌듯하기도 했고, 그럴 자격 또한 충분하다고 여겼다. 실제로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새벽까지 일하는 생활을 반복했으니 그런 고생에 대해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당연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하지만 굳이 따져본다면 회사에서 직장인에게 주는 보상은 월급에서 그친다.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그 월급을 받기 위해 굴렀던 한 달 간의 심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 돈을 몽땅 다 쓰면서 쾌감을 느꼈다. 옷, 전자기기, 음식… 돈 대신 시간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인터넷 쇼핑으로 틈틈히 돈을 쓰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 앞에 수북히 쌓인 택배를 마주했다. 하나씩 뜯어서 반짝이는 새 물건을 마주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내가 원했던 건 물건이 아니었다. 새 물건,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이 능력이 있다는 걸 소비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무슨 로맨스 소설 속 바람둥이 주인공도 아니고, 무언가 갈망하며 얻기 위해 노력을 들이는 나 자신에 심취한 나머지 정작 그게 내 것이 되면 감정이 팍 식었다. 자연히 소비로부터 오는 짜릿함은 길지 않았다. 대신 이미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좋고 싸고 예쁜 물건이 SNS 광고창에 올라오면 그걸 구매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놈의 ‘직장인 필수템’’기본템’ ‘전투복(출근용으로 돌려입는 복장) 착장 조합’은 왜 그렇게 많은지… 물건에 대한 감정이 금방 식는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남들은 기본적으로 하나씩 사는 거니까’ ‘이 정도 버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갖춰야하니까’와 같은 생각으로 소비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처럼 돈을 쓰지 않는 건 전만큼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돈을 버는 데에 들어간 스트레스를 돈으로 해소하는 굴레가 허무하다는 걸 깨달아서 달라진 것도 있다. 스트레스도, 돈도 덜 받는 대신 소비를 줄이는 삶은 어떨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삶이 마냥 환상적인 건 아니다. 가계부와 가격표의 노예가 되어 있는 힘껏 통장을 조여매는 내가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대신 나는 시간 부자가 되었다.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하기 위해 통근도 하지 않고, 기존 업무 시간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시간만큼만 일하고 있다. 그리고 돈 대신 시간이 많아지면 소유, 소비, 물질과 맺는 관계 역시 달라진다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돈 없이도 누릴 수 있거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과 관계에 집중할 여유가 생겼다. 소비로서 나의 가치나 자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강제되다보니, 소비 없이도 나를 표현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발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거창하게 썼는데 별 거 없다. 오후 2시에 한적한 거리를 산책하면서 햇살을 누리는 일. 24시간 동안 사랑하는 고양이들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일. 내 안을 파고들며 성찰하고, 발견한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 쓰고 보니까 참 소박한데 시간이 없을 땐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물론 거기에도 재료값이라든가 입에 들어가는 음식, 머리 위를 덮는 지붕 등 최소한의 소비가 동반되긴 한다. 많이 벌 때처럼 사랑하는 존재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턱턱 살 수 있는 여유가 아쉬울 때도 많다. 하지만 어디 세상에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삶이 있겠나. 불만족스러운 건 그냥 그런대로 받아들이면서 산다. 소비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고도 이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2. 오래될 수록 빛나는 것들
시간의 가장 큰 매력이자 가치는 바로 한 번 흐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다. 돈이야 언제든 벌 수 있지만 시간은 과거로 되돌려 부족함을 만회하거나, 헤르미온느처럼 마법의 모래시계를 뒤집어가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누리면서 살 수는 없다. 물론 화폐 가치는 계속 떨어지고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고 부지런히 자본을 쌓아놔야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다보니, 돈도 벌어야하는 때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결국 시간이랑 결부된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희소한 건 바로 시간이 깃든 존재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물건들은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낡고, 삭아 없어진다. 그래서 그 시간을 견디고 과거를 켜켜이 쌓아온 것들이 그만큼 빛난다. 이번에 영국에 갔을 때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 몇 곳을 들렀는데, 거기서 1960년에 출간된 소설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발견했다. 제아무리 일론 머스크 같은 부자라고 하더라도 화성에 가면 갔지, 1960년으로 돌아가서 내가 발견한 이 책과 같은 책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엄청난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과 한국까지의 14시간 비행을 견디려면 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4파운드(한화로 약 6,800원)을 주고 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 손에 넣은 이 버전이 출시된 날에만 20만 권(!)이 팔렸다고 하니 시장에 풀린 숫자로 따지자면 아주 희귀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출시 후 책에 포함된 성적인 묘사가 외설이라는 이유로 이를 출판한 펭귄 출판사가 재판대에 올랐고, 출판사가 승소하면서 이를 계기로 표현의 자유가 한층 더 진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의 한 조각을 소장했다는 뿌듯함은 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실제로 그 재판의 담당 판사의 손을 거친 같은 버전의 책이 경매에서 약 87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책을 처음 샀던 주인의 삶 역시 궁금해진다. 출판 전부터 꽤나 화제를 모았을텐데 과연 오픈런을 해서 득템했을까? (근데 위에 사진을 다시 보니까 이 책이 1쇄는 아니고 재쇄인 걸로 보아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그가 이 책을 산 서점의 풍경은 어땠을까? 성적 자유와 이를 표현할 자유에 대한 갈망이 들끓던 현실과 이를 따라가지 못하던 시대의 교차점에서 사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러다가 어떻게 어느 작은 영국 시골 마을의 헌책방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오래된 것들이 그대로 고여있는 그 마을 특성상, 왠지 책을 처음 산 곳과 팔린 곳 간의 거리가 크게 멀진 않았을 것 같다.)
같은 이유에서 몇 년 안에 살게 될 나의 집은 낡고 오래된 곳이었으면 한다. 비록 손을 봐야할 구석들이 많겠지만, 그래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앞으로 나와 인연을 맺게 될 물건들이 모두 골동품일 수 없다면, 최소한 나의 손을 떠난 뒤에도 충분히 쓰임이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가치있는 것이길 바란다.



올리고 나서 보니 새삼... 불과 지난주에 영국에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네요. 😟 TMI지만 귀국 직전에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한국 돌아온 뒤로 내내 칩거하고 있거든요. (사실은 집 밖으로 안 나갈 좋을 이유가 생겨서 좋기도 하지만요. 후후..) 그래서 뭔가... 계속 집에 있는 동안 영국에 갔다 온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또 가고 싶다)

'과연 물질주의를 벗어나면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읽었던 책 몇 권을 추천드려요.

0원으로 사는 삶 / 박정미 지음, 들녘 펴냄
보통 이런 책은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제목이 어그로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다릅니다. 저자는 진짜로, 문자 그대로,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제 기억으로는) 일 년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한국보다 물가가 훨씬 더 비싼 영국에서 그 여정을 시작해요.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지?'하고 읽다가 완독 후 책을 덮고 든 솔직한 생각은 '...음...난 솔직히 이렇게까지는 못 하겠다...'긴 했어요. 엄격한 0원 살이는 생각보다 삶의 조건이 꽤 극단적이더라고요.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신선한 음식을 찾아서 쓰레기통을 헤집거나, 노숙을 하거나 빈 집에 살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먼 거리를 이동하려면 폭우 속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위험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야 했다고 해요. 돈 대신 물물 교환이나 노동 제공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0원 살이 특성상 그런 방식이 지속 가능한 공동체에서 살아야하는데, 저같이 (과장 조금 보태서) 사람 알러지가 있는 경우엔 그 정도로 밀도있게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야하는게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0원 살이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고, 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삶을 온 몸으로 실천해낸 작가님에 대한 존경심도 듭니다. 지금은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집에서 직접 키운 작물을 먹으며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가신다고 해요.

어디에나 우리가 / 이승현 지음, 하모니북 펴냄 (이미지 출처)
부제처럼 '삶의 터전으로 지리산을 선택한 스물다섯 명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집입니다. 각자 지리산에 다다른 이유는 다르지만, 작은 시골 마을이라는 특성에서 우러나는 삶의 모습과 지향점은 닮아있다고 느꼈어요. 마냥 귀촌을 장밋빛으로만 그리는 납작한 이야기가 아닌 것도 좋았고요. 기대와는 달라 좌절했던 부분들, 현실적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서울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인터뷰 질문들이 사려깊으면서도 깊은 고민이 녹아있다고 느껴져서 더욱 좋았습니다.
아래는 읽고 싶었는데 위시 리스트에만 적어놓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입니다. 읽어본 분들이 계실지 궁금하네요.

30만원으로 한 달 살기 / 후지무라 야스유키 지음, 김유익 옮김, 북센스 펴냄
30만원으로 한 달이 해결이 된다니... 이 책이 '3만엔 비즈니스'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게 2012년이니까, 요즘 물가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하네요. (바로 위에서 '0원으로 사는 삶'이라는 책을 소개하긴 했습니다만..) 위 책들처럼 적게 소비하는 삶의 방식이라기보다는, 한 달에 30만원 정도만 버는 비즈니스 사례를 중심으로 다룹니다. 아직 책을 안 읽어봐서 모르겠으나, 그런 사례를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그 정도만 벌고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얘기도 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갈무리 펴냄
제가 얄팍한 지식과 매일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아! 자본주의는 너무 부조리하다!'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런 책을 쓰는 분들은 그런 막연한 불만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역사적 맥락을 요목조목 짚어줍니다. 벽돌책이라 읽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이반 일리치 저, 허택 옮김, 느린걸음 펴냄
'그래! 내가 쓸모없는 존재인 게 아니라, 사회 구조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 거야!' 라는 저의 또 다른 막연한 불만에 답을 제시해줄 것 같아서 담아둔 책입니다. 사실 '쓸모'라는 건 '유용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도 있잖아요. '내가 가진 능력들이 시장에서 교환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내가 무가치한 존재인 걸까?' 하고 고민을 해봤던 사람으로서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왠지 도서관에 다 있을 것 같은데, 읽고 추천하는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은 현실... 과연 나는 시간 부자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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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낮 1시, 새벽 6시, 오후 3시. 지난주 귀국 후 시차 적응에 애쓰고 있는데, 기상 시간이 이렇게 늘 변하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무려 오전 10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물론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재택 알바도 그렇고, 제가 하고 있는 대부분 일들이 크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지라 스스로를 힘들게 재촉하진 않으려 해요. (물론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생활리듬 회복이 필요하겠지만요. 낮밤이 쉴새없이 바뀌어서 그런지 입병이 났더라고요.)
이번 시즌 주제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지 않겠다’였는데요. 알바 덕분에 전보다 안정성이 늘었을 뿐, 돈벌이 수단이 꼭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전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된 건 아니예요. 이전 에피소드에서도 여러 차례 다뤘지만 가벼운 주머니 때문에 스스로가 작아지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생계를 걱정하는 일이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이 더 만족스럽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아마도 이렇게 사는 시간이 쌓이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저에게 더 편안하게 느껴지고, 오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천천히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과연 그 태도의 변화가 무엇인지 몇 가지 적어보려 했어요. 적다보니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나머지 소재는 다음 편에서 다룰 예정인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1. 소유, 소비, 물질과 맺은 관계를 돌아보다
직장인 시절에는 ‘돈 벌면서 고생한 나를 돈으로 치유하자’라는 생각이 당연했다. 나의 노력으로 번 돈으로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서 스스로가 어른 같이 느껴져 뿌듯하기도 했고, 그럴 자격 또한 충분하다고 여겼다. 실제로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새벽까지 일하는 생활을 반복했으니 그런 고생에 대해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당연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하지만 굳이 따져본다면 회사에서 직장인에게 주는 보상은 월급에서 그친다.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그 월급을 받기 위해 굴렀던 한 달 간의 심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 돈을 몽땅 다 쓰면서 쾌감을 느꼈다. 옷, 전자기기, 음식… 돈 대신 시간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인터넷 쇼핑으로 틈틈히 돈을 쓰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 앞에 수북히 쌓인 택배를 마주했다. 하나씩 뜯어서 반짝이는 새 물건을 마주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내가 원했던 건 물건이 아니었다. 새 물건,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이 능력이 있다는 걸 소비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무슨 로맨스 소설 속 바람둥이 주인공도 아니고, 무언가 갈망하며 얻기 위해 노력을 들이는 나 자신에 심취한 나머지 정작 그게 내 것이 되면 감정이 팍 식었다. 자연히 소비로부터 오는 짜릿함은 길지 않았다. 대신 이미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좋고 싸고 예쁜 물건이 SNS 광고창에 올라오면 그걸 구매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놈의 ‘직장인 필수템’’기본템’ ‘전투복(출근용으로 돌려입는 복장) 착장 조합’은 왜 그렇게 많은지… 물건에 대한 감정이 금방 식는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남들은 기본적으로 하나씩 사는 거니까’ ‘이 정도 버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갖춰야하니까’와 같은 생각으로 소비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처럼 돈을 쓰지 않는 건 전만큼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돈을 버는 데에 들어간 스트레스를 돈으로 해소하는 굴레가 허무하다는 걸 깨달아서 달라진 것도 있다. 스트레스도, 돈도 덜 받는 대신 소비를 줄이는 삶은 어떨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삶이 마냥 환상적인 건 아니다. 가계부와 가격표의 노예가 되어 있는 힘껏 통장을 조여매는 내가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대신 나는 시간 부자가 되었다.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하기 위해 통근도 하지 않고, 기존 업무 시간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시간만큼만 일하고 있다. 그리고 돈 대신 시간이 많아지면 소유, 소비, 물질과 맺는 관계 역시 달라진다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돈 없이도 누릴 수 있거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과 관계에 집중할 여유가 생겼다. 소비로서 나의 가치나 자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강제되다보니, 소비 없이도 나를 표현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발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거창하게 썼는데 별 거 없다. 오후 2시에 한적한 거리를 산책하면서 햇살을 누리는 일. 24시간 동안 사랑하는 고양이들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일. 내 안을 파고들며 성찰하고, 발견한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 쓰고 보니까 참 소박한데 시간이 없을 땐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물론 거기에도 재료값이라든가 입에 들어가는 음식, 머리 위를 덮는 지붕 등 최소한의 소비가 동반되긴 한다. 많이 벌 때처럼 사랑하는 존재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턱턱 살 수 있는 여유가 아쉬울 때도 많다. 하지만 어디 세상에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삶이 있겠나. 불만족스러운 건 그냥 그런대로 받아들이면서 산다. 소비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고도 이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2. 오래될 수록 빛나는 것들
시간의 가장 큰 매력이자 가치는 바로 한 번 흐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다. 돈이야 언제든 벌 수 있지만 시간은 과거로 되돌려 부족함을 만회하거나, 헤르미온느처럼 마법의 모래시계를 뒤집어가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누리면서 살 수는 없다. 물론 화폐 가치는 계속 떨어지고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고 부지런히 자본을 쌓아놔야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다보니, 돈도 벌어야하는 때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결국 시간이랑 결부된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희소한 건 바로 시간이 깃든 존재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물건들은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낡고, 삭아 없어진다. 그래서 그 시간을 견디고 과거를 켜켜이 쌓아온 것들이 그만큼 빛난다. 이번에 영국에 갔을 때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 몇 곳을 들렀는데, 거기서 1960년에 출간된 소설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발견했다. 제아무리 일론 머스크 같은 부자라고 하더라도 화성에 가면 갔지, 1960년으로 돌아가서 내가 발견한 이 책과 같은 책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엄청난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과 한국까지의 14시간 비행을 견디려면 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4파운드(한화로 약 6,800원)을 주고 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 손에 넣은 이 버전이 출시된 날에만 20만 권(!)이 팔렸다고 하니 시장에 풀린 숫자로 따지자면 아주 희귀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출시 후 책에 포함된 성적인 묘사가 외설이라는 이유로 이를 출판한 펭귄 출판사가 재판대에 올랐고, 출판사가 승소하면서 이를 계기로 표현의 자유가 한층 더 진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의 한 조각을 소장했다는 뿌듯함은 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실제로 그 재판의 담당 판사의 손을 거친 같은 버전의 책이 경매에서 약 87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책을 처음 샀던 주인의 삶 역시 궁금해진다. 출판 전부터 꽤나 화제를 모았을텐데 과연 오픈런을 해서 득템했을까? (근데 위에 사진을 다시 보니까 이 책이 1쇄는 아니고 재쇄인 걸로 보아 그건 아니었을 것 같다.) 그가 이 책을 산 서점의 풍경은 어땠을까? 성적 자유와 이를 표현할 자유에 대한 갈망이 들끓던 현실과 이를 따라가지 못하던 시대의 교차점에서 사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러다가 어떻게 어느 작은 영국 시골 마을의 헌책방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오래된 것들이 그대로 고여있는 그 마을 특성상, 왠지 책을 처음 산 곳과 팔린 곳 간의 거리가 크게 멀진 않았을 것 같다.)
같은 이유에서 몇 년 안에 살게 될 나의 집은 낡고 오래된 곳이었으면 한다. 비록 손을 봐야할 구석들이 많겠지만, 그래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앞으로 나와 인연을 맺게 될 물건들이 모두 골동품일 수 없다면, 최소한 나의 손을 떠난 뒤에도 충분히 쓰임이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가치있는 것이길 바란다.
올리고 나서 보니 새삼... 불과 지난주에 영국에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네요. 😟 TMI지만 귀국 직전에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한국 돌아온 뒤로 내내 칩거하고 있거든요. (사실은 집 밖으로 안 나갈 좋을 이유가 생겨서 좋기도 하지만요. 후후..) 그래서 뭔가... 계속 집에 있는 동안 영국에 갔다 온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또 가고 싶다)
'과연 물질주의를 벗어나면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읽었던 책 몇 권을 추천드려요.
0원으로 사는 삶 / 박정미 지음, 들녘 펴냄
보통 이런 책은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제목이 어그로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다릅니다. 저자는 진짜로, 문자 그대로,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제 기억으로는) 일 년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한국보다 물가가 훨씬 더 비싼 영국에서 그 여정을 시작해요.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지?'하고 읽다가 완독 후 책을 덮고 든 솔직한 생각은 '...음...난 솔직히 이렇게까지는 못 하겠다...'긴 했어요. 엄격한 0원 살이는 생각보다 삶의 조건이 꽤 극단적이더라고요.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신선한 음식을 찾아서 쓰레기통을 헤집거나, 노숙을 하거나 빈 집에 살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먼 거리를 이동하려면 폭우 속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위험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야 했다고 해요. 돈 대신 물물 교환이나 노동 제공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0원 살이 특성상 그런 방식이 지속 가능한 공동체에서 살아야하는데, 저같이 (과장 조금 보태서) 사람 알러지가 있는 경우엔 그 정도로 밀도있게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야하는게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0원 살이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고, 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삶을 온 몸으로 실천해낸 작가님에 대한 존경심도 듭니다. 지금은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집에서 직접 키운 작물을 먹으며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가신다고 해요.
어디에나 우리가 / 이승현 지음, 하모니북 펴냄 (이미지 출처)
부제처럼 '삶의 터전으로 지리산을 선택한 스물다섯 명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집입니다. 각자 지리산에 다다른 이유는 다르지만, 작은 시골 마을이라는 특성에서 우러나는 삶의 모습과 지향점은 닮아있다고 느꼈어요. 마냥 귀촌을 장밋빛으로만 그리는 납작한 이야기가 아닌 것도 좋았고요. 기대와는 달라 좌절했던 부분들, 현실적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서울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인터뷰 질문들이 사려깊으면서도 깊은 고민이 녹아있다고 느껴져서 더욱 좋았습니다.
아래는 읽고 싶었는데 위시 리스트에만 적어놓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입니다. 읽어본 분들이 계실지 궁금하네요.
30만원으로 한 달 살기 / 후지무라 야스유키 지음, 김유익 옮김, 북센스 펴냄
30만원으로 한 달이 해결이 된다니... 이 책이 '3만엔 비즈니스'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게 2012년이니까, 요즘 물가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하네요. (바로 위에서 '0원으로 사는 삶'이라는 책을 소개하긴 했습니다만..) 위 책들처럼 적게 소비하는 삶의 방식이라기보다는, 한 달에 30만원 정도만 버는 비즈니스 사례를 중심으로 다룹니다. 아직 책을 안 읽어봐서 모르겠으나, 그런 사례를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그 정도만 벌고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얘기도 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갈무리 펴냄
제가 얄팍한 지식과 매일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아! 자본주의는 너무 부조리하다!'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런 책을 쓰는 분들은 그런 막연한 불만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역사적 맥락을 요목조목 짚어줍니다. 벽돌책이라 읽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이반 일리치 저, 허택 옮김, 느린걸음 펴냄
'그래! 내가 쓸모없는 존재인 게 아니라, 사회 구조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 거야!' 라는 저의 또 다른 막연한 불만에 답을 제시해줄 것 같아서 담아둔 책입니다. 사실 '쓸모'라는 건 '유용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도 있잖아요. '내가 가진 능력들이 시장에서 교환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내가 무가치한 존재인 걸까?' 하고 고민을 해봤던 사람으로서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왠지 도서관에 다 있을 것 같은데, 읽고 추천하는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은 현실... 과연 나는 시간 부자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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