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유능한 번역가가 꼭 100% 전업 번역을 의미하는 걸까?

연옥
2024-09-14

유능한 번역가가 되고 싶은 건 당연하다.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고 탁월한 어휘, 표현을 찾아서 딱 맞추는 쾌감을 느끼고 싶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고 쌓여서 내면도 충만해지고, 외부적으로도 능력을 인정받는 번역가가 되는 게 목표다. 

번역으로만 고정 수입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러기 무척 어렵다는 걸 안다. 번역가들이 모여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다보면 시장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 일을 전업으로 만들어서 먹고 살기 얼마나 힘든지 실감이 난다. 

그나마, 그나마 출판 번역은 책을 한 권 번역한다고 하면 그래도 몇 개월짜리 일감이 확보된다고 치자. (물론 이것마저 따내기 무척 힘든 일감이고, 이보다 훨씬 더 짧은 문서 번역 일도 있는 걸 알고 있다. 출판 번역이 상대적으로 쉽거나 돈 벌기 편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하지만 영상 번역은? 지금처럼 2, 3분짜리 영상을 스무 개, 삼십 개 하고 있다보면 예전에 자기소개서 첨삭할 때 3만원 짜리 일 열 개 받으려고 300시간을 뛰던 시절이 생각이 난다. 이런 상업/홍보용 영상 말고 영화나 드라마를 번역하면 분량이 늘어나니까 좀 나으려나? 하지만 영상 번역 업계는 업무에 투입해야 하는 시간에 비해서 마감일을 엄청 타이트하게 주기로 악명이 높다. 짧은 시간 안에 바짝 일을 쳐내는 스타일이 나에게 더 잘 맞기는 하지만, 그만큼 소화할 수 있는 분량이 많을래야 많을 수는 없을 거다. 그런 일이 매월 n건 꾸준히 들어오길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걸, 몇 년간 첨삭 노동자로 활동하면서 이미 절절하게 느꼈다.


그런 생활에 신물이 났던 시절, 결국 내가 찾은 건 고정 수입을 위한 임금 노동을 포함한 N잡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즘의 직업 현황(?)은 다음과 같다:

1. 고정 수입/임금 노동에 해당되는 재택 알바

: 장기적 비전, 자아 실현과 관련 없지만 돈을 위해서 하는 일.

 매월 정기적으로, 예측 가능한 일감이 들어옴. 월 생계비의 90~100% 충당

2. 출판사

: 취미에 가깝지만 그래도 월 10~20만원 내외의 수입 발생

3. 자유로운 예술/창작 활동

: 우연히 수입이 나면 좋지만(예: 글/만화 외주) 이에 거의 구애받지 않음. 뜨개질, 재봉틀처럼 순수한 취미 생활도 포함. 

이렇게 삶이 3분할 되어 있는 상태. 근데 상업 영상 번역을 왜 뺐냐면, 정기적이고 꾸준한 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일감이 너-무 안 들어오고 있기 때문... 거기에 목을 매달고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어떨지 너무 뻔하다. 


유능한 번역가가 꼭 100% 전업 번역을 의미하는 걸까? 한 달에 몇십 만원 수준의 일감만 받는 생활을 유지하더라도 여전히 좋은 번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더 많은 일을 원하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일을 더 못 받는 상황이 아니라, 일을 더 받지 않기를 선택하는 거라면 말이다. 

(마치 1인 출판사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출판하고,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대형/온라인 서점에 유통하면서 더 많은 수입을 노리는 게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걸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덜 우수한 출판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난 그냥 그건 지향하는 바가 다를 뿐이지 틀리거나 덜 떨어진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계비를 100% 충당할 수 없는 수준의 돈만 받더라도 걱정이 없을 정도로 다른 수입원을 탄탄하게 만들어놓으면, 오히려 돈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번역이 주는 보람 자체에 좀 더 몰두해서 일을 즐겁게,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나는 출판, 번역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그 중 한 가지만 꼽자면, 서울을 떠난 뒤 공간을 운영해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물론 초반에는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쏟아붓고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수입원이 또 늘어나는 셈이다. 그만큼 번역으로‘만‘ 돈을 벌어야한다는 압박도 많이 줄어들 거다. 그럼 번역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출판사보다는 더 벌고 보다 전문적이고, 첨삭 노동보다는 좀 더 비전이 있는 일. 고정 수입을 위한 알바에 비해서 버는 돈은 적지만, 자아 실현에 가까운 일. 이 정도만 되어도 나는 무척 만족할 것 같다.

좋아하고, 잘하고, 수요가 존재하는 일 등의 3가지 요건을 모두 만족하는 완벽한 교집합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중 일부만 서로 다른 비율로 만족하는 일들을 조합해서 삶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일이 좋아도 일이 삶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삶은 여행이자 소풍이다. 어떤 고정된 목표나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그저 즐기고, 놀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가꾸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프로 번역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언어를 치열하게 파고드는 몰입감, 내지는 장인 정신을 갈고 닦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는 뜻일 뿐이지 번역을 위해 인생을 갈아넣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살면서 한 편 정도의 영화나 드라마에 내 이름이 걸렸으면 좋겠다. 서른이 넘어 배우기 시작한 제2외국어인 이탈리아어로 번역을 해서 그렇게 이름이 걸리는 날이 온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딱 그 정도다. 삶이 나를 심각한 궁핍으로 몰아넣는 상황이 닥치지 않는 이상 이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일을 대하고 싶다.


9월 말부터 다니게 될 번역 아카데미도 인생의 정원의 한 켠에 새로운 꽃을 심는 첫 번째 과정일 뿐, 거기에서의 평가나 결과로 인생이 좌우될 것이라고 비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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